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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른 아침마다 닭과 염소가 울어, 그 소리에 잠을 깨는 곳, 여름이면 양철지붕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늦 잠을 잘 수 없어 자연스럽게 잠이 깨는 곳. 우기가 되면 한밤인데도 천둥번개 때문에 대 낮 밝은 곳. 남반 구 어디쯤인데, 아프리카의 남쪽으로 있는 나라, 국경의 대부분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 싸여있고 고 지대인 땅, 스와질란드 왕국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의사로 일하고 있는 곳. 내가 의사가 되 자마자 온 곳. 의사로 환자를 처음만난 곳이기에 많은 환자들의 기억이 있는 곳, 내가 이곳에 있거나 떠 나도 아쉬움이 넘쳐나는 곳이다.


  놈필로를 처음 만난 것은 스와질란드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 주 화요일 오후에 도착했고, 수요 일 아침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첫 주말이었다. 방문 진료를 위해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갔다. 30분 정도 지나서였을까, 언덕길 아래쪽에 몇 채의 집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보니 진흙과 바 위 그리고 짚으로 만든 집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을 안 한 아주머니가 큰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주 머니는 우리를 어느 한 집으로 데려갔고 그 집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군가 누워있었다. 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안에서 누워있던 그 사람은 덮고 있던 낡은 담요를 내렸다. 그리고 힘들어 보 이는 기색이었지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가 20대 후반의 HIV환자 놈필로였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놈필로는 대다수의 스와지사람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기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갔다. 스와질란드 에는 충분한 일자리가 없고, 있다 해도 그 일당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나라의 많은 사람 들은 옆 나라의 광산 등으로 일을 하러간다. 놈필로도 그랬다. 돈을 벌기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갔 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곳에 있으면서 자신이 HIV양성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 고 더 이상 일을 견뎌 낼 수 있는 몸이 아닌 것을 알게 되자 고향 카풍아로 돌아 온 것이다.

  놈필로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의사로서 그에게 무엇을 해줘야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해서 면허가 있다고 하지만, 내가 환자를 만난 곳은 병원이나 의원이 아니었다. 스와질 란드의 산골마을의 작고 초라한 집에서 담요를 두르고 누워있는 환자를 보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 하였기에 긴장한 탓일까? 환자를 대하면서 시작할 수 있는 따뜻한 말이나 건강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보 다는 지금의 증상을 물어보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한 20분 동안 그 방에 앉아있었을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나의 서툰 진료에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다음 방문 진료일이 되었다.나와비슷한나이에아무것도하지못하고 빈방에누워있기만해야하는 HIV환자를 보러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한국에서 편하게 공 부를 했지만, 놈필로는 다른 나라에 일을 하러 가야 했고, 그리고 병에 걸렸기 때문일까? 나는 전기와 물이 들어오는 편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전기와 물이 없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나와 대조되는 삶의 모습들이 죄책감을 가지게 했고, 그 감정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봤기 때문에 좀 나아진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들어보 면 하루 종일 방에만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날씨가 따뜻할 때, 햇빛을 쐬기 위해 좀 밖에 나가있어 보라고 부탁을 했다. 놈필로는 웃으면서 나가 보겠다고 했다. 설사는 멈추었다고 했지만, 기침은 멎지 않는 다고 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스와질란드에서 HIV환자들에게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HIV환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다른 기관들의 원조를 받아 항바이러스 치료를 정 부병원에서 시행중이고, 상당수의 사람들의 그 치료를 받고 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을 관리하고, 그들의 상태가 나빠졌을 때 찾아가 다른 병들을 치료해주고, 영양지원을 해주는 일 밖에 없다. 놈필로에게도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 번째 방문 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흐려 매우 추웠다. 놈필로의 방문은 언제나처럼 닫혀 있었고, 문 하나와 막혀 있는 창문 하나 있는 방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 방안은 나무 타는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차 있 었다. 이러한 공기를 하루 종일 마셔댔다가는 나라도 병이 날 것 같은 방 안이었다. 창문과 방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놈필로는 춥다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문을 여니 연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불은 더 잘 타 게 되고 방안은 더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계속되는 기침으로 이야기를 지속 할 수 없었다. 혹시나 폐렴이나 결핵인가 하는 걱정으로, 호흡음을 들어보기로 했다. 세 번의 방문 만에 처음으로 놈필로가 담요를 걷어내고 앉았다. 청진을 하기위해 등 쪽으로 갔다. 등은 너무나도 말라 뼈밖에 보이지 않았다. 갈비뼈와 어께 뼈가 그대로 들어나는 등이었다. HIV와 싸우기에는 너무나 말라 있는 몸이었다. 이렇게 말라 있는 몸으로 과연 병과 싸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호흡음을 듣고 나니, 놈필로의 어머니가 욕창을 소독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고보니 지난 세 번의 방문 내내 오른쪽으로만 누워있었던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아 그래. 그랬구나. 욕창은 이미 많이 진행이 된 상태라 피와 고름이 섞여있었다. 장갑을 두 겹 끼고, 고름을 닦고,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주었다. 그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HIV환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나는 스스럼없이 그 일을 했 다. 병원실습 때는 회진을 도는 것 마저 피하려 했었고, 처음 이곳에 와서는 보호 장비를 착용한 뒤 환자 에게 다가가려 했었는데, 이젠 내가 돌봐야 하는 환자이고, 이미 내가 돌봐 온 환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까? HIV환자에 대한 심적 두려움은 더 이상 없었다. 거리감 더 이상, 그것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는 그 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속적인 영양관리가 필요하 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꾸준히 잘 먹고, 체중이 불고, 몸에 힘이 생기면, 항바이러스 제를 먹으면서 잘 견 딜 것이고 그러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더 이상 방안에만 누워있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고 진료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소식을 전해주었다. 지난 주, 놈필로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었다. 날짜를 물어보니 방문 진료를 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손을 잡고, 호흡음을 듣고, 욕 창 소독을 해준 그 다음날이었다. 정말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3주 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매주 얼굴 을 보아왔고, 이제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갈피가 잡히는 듯 했는데, 그러한 고민에 대한 실행을 시작하기 도 전에 죽은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죽음이 하늘에 달렸다고 하지만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를 꽤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죽음을 막기 위해 내가 해 왔던 일들이,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나를 무기력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을 막고 싶어졌다. 이곳 아프리카에는 다른 땅보다 더 많은 죽음이 일 어나고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병에 걸려 있는 환자를 더 많이 돌보는 것 일 까? 그러기 위해 많은 의사를 이곳으로 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첨단 의료시설이 있는 병원을 만드는 것 일까? 하지만 이것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고, 잘 쉰다면 질병에 걸릴 확률자체가 줄어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 말이다. 단지 질병에 걸렸을 때만 환자를 돌보는 그러한 의사가 아니라, 이들의 삶 자체를 보 고 좀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좀 더 옳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들이 사는 곳에 살아야 하고 이들의 삶을 돌보는 그러한 사람 말이다. 하지만 그 일들이 한 사람에게 의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도 사람이기에 결국 그곳을 떠 나야 하거나 나이가 되면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의 일은 다 끝나버리지 않을까? 지 속가능한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내가 카풍아를 떠나더라도, 또는 다른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누군가 가 떠나더라도, 이들이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만들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변 화에 나도 참여하고 싶다. 훗날 나와 같은 사람이 없더라도 이들이 꾸준히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아마 놈필로의 죽음은 단순한 불치병 환자의 죽음으로 기록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왜 병에 걸렸고, 어 떠한 상태로 그 병과 싸워왔는지를 본다면,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질병이 아니라 이곳 전체의 상황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더 많은 노력과 사람이 이 땅에 필요하다. 아직도 이 땅 아프리카에 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어떠한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방문 진료 날이다. 그리고 난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


2011.11.23




      Tag - AFRICA, kaphunga, Swaziland
      Kaphunga 진료소 일기  |  2012/01/04 13:32




카풍아를 떠난지 벌써 1달이 지났다. 카풍아에서 있었던 시간이 4개월이었는데, 그것에 1/4이나 되는 시간을 금세보냈다는게 어딘가 속상하다. 카풍아에서의 시간은 매일매일이 귀했고 한달한달 배워가는게 있었는데, 뭐랄까 이곳 쌀나라에 와서의 1달은 너무나 빨리지나 갔다고 해야할까? 분명히 쌀나라에서 배우는것들도 있는데 , 대부분 배우는것들은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라는 것일까.. 게으르고 생각 없고 낭비많고 쇼핑만 해대는 쌀나라에 들에게서 무언가 선한것이 나올까라 라는 생각이 들지만, 적어도 다문화에 대한 배려(?!)에 대해서는 내가 태어났던 나라보다는 낫지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각미국의 차이를 보았다. 그래봤자. 미국에서 있었던 주는 조지아, 텍사스, 일리노이 뿐이지만 각각 주의 차이가 참 크게와 닿았다. 뭐 사실 일리노이의 북쪽인 시카고는 일리노이라고 보기보다는 하나의 독립된 도시로 평가하는게 옳겠지만 말이다.

이 미국인들의 게으름은 정말 어쩔 수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미국이 이러한 게으름으로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하지만 이런식으로 소비적인 일자리의 창출이 필요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생산적적인 일자리가 아닌 소비적인 일자리라. 나는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낭비를 통한 일자리창출보다는 절약을 통한 일자리창출이 옳지 않나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어제 그동안 신세를졌던 분들에게 이메일을 보넀다. 물론 카풍아에 있는 수진교무님에게도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한가지 비보를 들었다. 안드레아스가 죽었다는 이야기다. 매번 방문진료때 마다 보았던 안드레아스, 결핵약으로 인한 이독성(Ear-toxicity) 떄문에, 귀가 잘 들리지 않고, 간독성(Liver- toxicity)때문에, 복수가차고, 다리에 부종이 생긴듯 했는데, 갑자기 호흡이 힘들어지고. 그렇게 죽었다고 한다. 아마 기저질환으로 간경화등이 있었고 그로 인해 드디어 폐에도 물이 차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카풍아에서 잊지못했던. HIV/AIDS환자 세명중 두명이 떠났다. 이제 한명이 남았다. 근데 그 한명도 얼마나 살아있을지 모르겠다.

떄로는 그러한 사람들을 뒤로하고, 이곳 쌀나라에서 낭비와 사치를 일삼으면서 맘편히 쉬고/놀고 있는 내모습에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나는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지 실제로 보고온 사람이 아닌가-

무엇이 사람들을 이렇게 불평등 하게 만들었을까? 단지 아프리카에 있는 사람들이 게으르고 생각이 없을 뿐이라고? 그러기엔, 그리고 내가보기엔 이 쌀나라의 사람들이 더 게으르고, 더 생각이 없다.

무엇일까. 이묘 한 기분은.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그리고 착찹한 마음은 무엇일까?

그리고 지금 보다 더 빠른 서울/대한민국 이라는 곳으로 돌아가면 어떠한 기분이 들까?


      생각하는일들  |  2011/12/30 05:00




스와질랜드 카풍아 원광 진료소를 다녀오며.

 

지난 2011 8 2일부터, 같은 해 11 25일까지 아프리카 스와지랜드 카풍아 원광 진료소에서 4개월간 의사로 지내온 이호준 입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제가 왜 그곳 카풍아로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겪었던 일들과 그곳에서 일어난 일들, 그리고 느낀 점들을 나누기 위해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저는 의사입니다. 그렇기에 의과대학을 나와야 했습니다. 중요한것은 그곳 에 들어가기전에 저에게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7년전, 2004 6월 말, 전 남아프리카의 부스터 라고 불리는 작은 마을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3개월 정도를 보낸다음, 다시 이집트와 수단등에 있으면서 아프리카 라는 대륙이 어색하지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그덕에 의과대학에 있는 6년내내 계속 아프리카를 그리워 하게 되었고, 그렇기에 이번에도 오게되었습니다.

 

그러한 아프리카에서의 경험 때문에, 저는 평생 이들을 위해서 또는 이들과 같이 사는 의사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실제로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지 않고 그것을 위해서 수련을 받고 공부를 한다는 것은 조금은 어려운일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의대를 졸업하고, 1년 정도 제가 하고자 하는 일들에 대해 미리 경험해보자 라는 마음을 가지고 카풍아로 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카풍아 원광 진료소는 지난 1년간 이곳에 있었던 권준호 라는 기생충학 전공을 하는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친구를 통해서 이곳을 알게 되었고,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한번 와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곳을 오려 결정할때 한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종교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이였고, 기독교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그리고 지난 2004년에 1년간 아프리카에 있을때는 기독교의 선교사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 고민들이 있었고, 갈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가난하고 병든사람을 도와야 하는 일이라면, 종교보다는 그들을 돕는것이 더 우선되고 중요시 되어야 한다고 생각 했기에,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기에, 마지막으로 이곳을 오기로 결정했습니다.

 

스와질란드는 참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입니다. 이미 알고 계신분들도 있겠지만 전세계에서 가장높은 HIV(사람면역바이러스)의 감염율을 가지고 있고(26%), 가장 낮은 평균기대수명 (37)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통계수치에서 보이는데로, 많은 사람들이 HIV에 감염되어있고, 그로인해 상당한 수준의 사람들이 일찍 죽게되는 그러한 나라입니다.

 

수 많은 HIV환자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들이 건강하지 못한 이유는 단순한 HIV 때문이 아닙니다. 외국과의 원조협약등을 통해서 항바이러스 제제들을 먹고 있는 환자들이 많지만, 그 약을 견딜 수 있는 체력과 영양을 공급받지 못하기에, 굶어죽고 말라가는 환자들이 더 많은 곳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37세라는 짧은 평균수명과, 27% 높은 감염율 때문에, 부모가 동시에 HIV가 환자인 아이들이 많고 그렇기에 그런 아이들은 상당 수 태어났을때부터 HIV환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HIV때문에 일찍 죽게됩니다. 그렇게 어렸을때부터 HIV환자로 살아가야 하는 고아환자들이 많은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그들은 HIV를 예방하지 않습니다. 진료소에 찾아오는 HIV환자들이, 자신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는것을 알면서도, 콘돔과 같은 피임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비 감염자와 성관계를 같는 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왜 이렇게 높은 비율의 감염이 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알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진료소로 찾아오는 사람들이 모두 HIV환자 인것은 아닙니다. 준호의 경우처럼 기생충 환자도 많습니다. 한국에서는 일년에 한번정도 먹는 구충제를 매일 줘야하는 일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거의 써본적이 없는 프라지꽌뗄이라는 약도 여러번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감염병 환자들을 보고 있자 하면, 아 정말 아프리카 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반면에, 만성병환자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선진국병이라고 알려져 있는 당뇨병이나 고혈압 환자의 비율도 높습니다. 사실 이곳 사람들은 설탕을 좋아하기 때문에, 체중이 증가하고, 그로인해서 고혈압과 당뇨는 쉽게 생기게 됩니다. 젊은 시절 HIV로부터 견뎌, 그 삶을 살아 남는가 하면, 어느순간 당뇨,고혈압 또는 관절염과 같은 만성병질환으로 아파하고 어려워 합니다.

 

많은 수의 스와지 사람들이 이렇게 어려워 하고 있는데 정부의 병원은 그렇게 여유로운 편은 아닙니다. 현지병원에서 관리를 받고 있는 고혈압, 당뇨환자들의 경우, 현지 병원의 시설이 열악하기에, 카풍아진료소로 검사를 받으러 오기도 합니다. 물론 검사 뿐만이 아닙니다. 정부병원에 약이 떨어졌기 때문에, 같은 약을 받으러, 또는 카풍아 진료소로 담당 의원을 바꾸기 위해서 오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사실 스와지랜드의 비-도시 / 도서 산간지역은 의료시설이 없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어느정도 자원봉사 병원에 의지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그런곳에서 저는 무엇을 했을까요?

 

가장 먼저가 된것은 그곳 진료소에서 매일매일 환자를 보는것이었습니다. 적은날은 20명가량에서 많은날은 50명이 넘는 환자를 보았습니다. 물론 딱 어느정도다 라고 정해져 있는 숫자는 아닙니다. 그날그날의 날씨에 따라서 환자는 많이 달라집니다. 농번기나, 비가오는날 추운날은 하루에 채 10명정되 될듯한 환자를 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농빈기이거나, 날씨가 좋고, 그 전주쯤에 날씨가 추웠던 경우는 하루에 50명이 넘는 환자가 와서 정신이 없기도 합니다. 진료소 주변에 마을 회의나 행사가 있다면 그날은 하루 족히 70명은 넘게 봐야한다고 준비해야하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진료소에서 봐야하는 환자들이 있다면 일주일에 한번정도, 너무멀리있기에, 그리고 환자의 몸 상태가 안좋기에 진료소를 올 수 없는 HIV/AIDS 환자들을 보러가기위해 차를타고 30-40분씩 비포장 도로를 타고 더 산골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HIV에 감염되고 결핵에 감염되여 결핵약을 먹다가 귀가멀고, 간이 망가져, 소리를 잘 듣지 못하고, 복수가 차오르고 다리가 부어있는 안드레아스, 부모가 HIV환자여서 HIV를 어렸을때부터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고아가 되어 버린, 가난하지만 정이 많이 갔던 센조, 카풍아에서 처음 방문진료를 갔을때 만났던, HIV에 걸렸지만, 그리고 약을 먹고 있었지만, 그보다 영양상태가 너무 안좋았기에, 너무나도 말라있었던, 그리고 그래서 결국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놈필로 까지, 위에 이야기한 세명이 아니더라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던 방문 진료입니다.

 

그리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시간이 될때 카풍아가 아닌 다른 무의촌 지역으로 현지정부병원/의사 들과 힘을 합쳐 무의촌 봉사를 가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 각기 다른 나라에서온 4명의 의사들과 같이 400명 가량의 환자를 보았던 시토벨라 의료봉사와, 카풍아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고산지대에 있는, 수많은 기생충에 감염된 아이들과, 교통수단이 없어 정부병원조차 가지못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관절염환자를 보았던 마쯔아냐 지역 의료봉사가 있습니다.

 

4달이라는 시간은 참 짧은 시간이지만, 저에게는 그 어떤 곳에서의 시간보다 값지고 귀한 시간을 보낸 기간 이었습니다. 어떻게보면 평생 일을 해야할 곳일 수도 있는 아프리카를 좀더 깊게 이해 할 수 있는 시간 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내가 그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원조와 도움이 아닌 그들이 진정 필요로하는 원조, 그리고 그들에게 진정 도움이되는 원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도움에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혼자서 일어 날 수 있는 그러한 의미의 원조에 대해서 말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그곳에서의 시간은, 나보다 남을 생각하고,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 이었습니다. 매일의 일과를 마치고,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고나면, 꽤나 많은 자유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제한적인 공간과 제한적인 자원들인지라, 어떠한 재미있는 일을 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그리고 그에 따라서 내 자신과 남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그리고 바쁜 한국에서 가지지 못했던 내 자신에 대해서 돌보아볼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미 아프리카의 5개나 되는 나라를 다녀왔고, 또 나중에 어떠한 나라에 있게 될 수 있겠만, 이번 2011년의 스와지랜드의 카풍아는 평생 잊을 수 없는, 20대 인생에 가장 값진 순간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카풍아에계신 김혜심 교무님, 황 수진교무님, 도광교무님, 선공교무님 그리고 정명님모두들 그곳에서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2011.12.13
Evanston, Illinois, USA 

      Kaphunga 진료소 일기  |  2011/12/1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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