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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전보건지소이야기

2주차 4일. 운전면허 그리고 자동차



사실 요즘 운전면허라는 것 때문에 정신이 없다. 정확히는 운전면허와 차를 사는것. 

차를 사는것은 어떠한 자본이 주어진 안에서 그자본을 가장 효과적으로 소비하는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정신이 없는것인데, 차를 사는것든 카메라를 사는것과 다르다고 한다. 사실 그러한 별다른 욕심이 없었다면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마음에 드는차를 사자였을 텐데. 사실 그것은 운전면허를 이 나이가 되도록 왜 따지 않았냐 와 연결 된다. 


그 슬픈 이야기의 시작은 고등학교 1학년때 였다. 우수한 용모와 올바른 학교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되어 각 학교마다 있는 학생 포돌이로 선발 되었던 나는 교련 선생님의 차를 타고 안산시 경찰서를 다녀 오던 순간이었다. 그때 교련선생님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떡꾹이는 26살이 지나고나서 면허를 따렴" 무슨 뜻이었을까, 내가 20대 초반의 나이에 차를 타면 무슨 사고라도 칠까봐 그랬던것이었을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대 초반이 되었지만 차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면허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안산-서울의 2년간 통학 그리고 4년간 서울에서의 자취가 시작되었다. 서울이라는 그 거대한 비인간적인 도시는 차가 없어도 살만하다. 대중교통은 발달 되어있고 가까운 마트는 버스로 다녀올 수있고, 내 연약한 체구는   마트에서의 장보는것을 견딜만하게 되었다. 돌아다니더라도 놀러다니더라도 대중교통이 있는곳으로 놀러다니고, 밥은 해먹지도 않았다. 병원식당이 쌌고, 서울에는 매일 새로운 식당을 가더라도 평생다 못 먹을만한 수만큼의 식당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차없이 20대의 중반이 지나갔다. 


작년에 잠깐 독일에 있던시절. 독일에서도 차없이 살만했다. 물론 중간에 이케아 라든가 리들 같은 거대한마트에 장보러 갈때는 차가 편했지만. 차운영비를 따지느니 가까운 REWE에서 매일매일 신선한 음식과 BIO과일들을 사먹는게나을꺼 같았다. 독일에서는 자전거로모든게 다 해결 되었다. 멀지 않았다. 사람이 움직일만한 거리였다. 


물론 더 짧게있었던 2달간의 미국에서는 차없이 살수 없는 비극과 지옥을 맛보았다. 미국은 지옥이었다. 대중교통과 자전거로는 장보기도 힘든. 무언가를 하기 힘든 지옥과 같은 곳이었다. 내가 있던곳이 그나마 미국에서 지하철이 있는 3대 대도시중에 하나인 시카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한국으로 들어왔다. 


20대의 후반을 바라볼 무렵. 사실 차에대한 욕심이 없었다. 공보의는 남극을 지원할꺼 같았고 붙을것 같았다. 그럼 수도권에 있으니 차가 없이 대중교통과 택시로 차량 운영비 및 기름값 감가상각을 견디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세상과 모든일은 내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지는것은 아닌것. 


서울과 꽤나 멀리 떨어진 전라남도로 배정받았고 (여기까지는 견딜만하다. 장성만 하더라도, KTX때문에 서울이 3시간 미만권이다). 그리고 전라남도에서 강진이라는곳 (기차가 없는 곳 기차역까지 40분이 걸리는곳), 그리고 강진에서도 한 면에 배정받았다. 


전라남도가 살기나쁜곳은아니다. 하지만 국토 불균형 발전때문에 자동차가 없이는 못가는 곳이 많고 (경상도와는 다르게 철도가 없는 지역이 많다) 또한 대중교통(농어촌버스)또한 저녁 7시 30분이면 읍에서 막차가 끊긴다. 면단위에는 작은 구멍가게 만 있을 뿐이고 반찬거리나 밥거리를 사기 위해서는 읍내에 있는 큰 농협에 가야한다. 


사실 20대 초반. 존경하는 한 선교사님의 고백을 듣고 나름 나도 다짐했던게 있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내 이름으로 된 집을 갖지 말자. 그리고 내 이름으로 된 차를 사지말자. 나그네 인생 나그네 처럼 살다 가자. 라고 말이다. 내이름의 소유가된 집은 아직까지는 없다. 하지만 이제 그 차에대한 고백을 꺠야하는 순간이 온거 같다. 


지구라는 터전을 가장 많이 파괴하는 화석연료와 그것에 주된 소비자 인간 그리고 그 도구 자동차. 

과연 나에게 자동차가 필요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그럴까. 그러할까. 그리고 자동차가 없이는 삶이 불편할 수 밖에 없는 이곳의 삶을 만든 정부와 국가가 미워졌다. 한편 차가 없이도 잘 사는 주변어르신들을 보면서 내가 너무나 많은 부와 편의를 누리는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대한 환경에 해가 되지 않는 차를 사고 싶었다. 그래서 경차를 선택했다. 작은차 연비가 좋은차를 선택했다. 과연 그 고집은 지켜질까? 모르겠다. 쉽지 않다. 작은 차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고 안전이라는 부분이 아직도 그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게 한다. 그렇다고 운전이라고 쉽겠는가, 그거또한 그런것은 아니하지 않는가. 


면허학원을 틈틈이 다니면서 이곳의 실상을 알게 된다. 외국에서 한국으로 시집을와 우리나라 사람이 된 사람들. 그 다른 언어로 매번 떨어진다는 필기시험에서 고생한다는 사연. 그리고 서울에는 보이지 않던 (또는 내가 관심이 없거나 보지 않았던) 문맹자들. 문맹률 때무에 필기시험자체가 너무나 어렵다고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젊은 청년까지 그런 사람들이 있는 곳이 대한민국 이었다. 


90년대 언저리쯤에 만들어진 저상이 아닌 고상버스에서 허리가 90도 가까이 꼬부라진 할머니가 짐을 지고 버스를 내린다. 버스를 올라오는 한칸 두칸 그것이 등산이고, 버스 뒷문으로 내려가는 한칸 두칸 그것이 공포의 내리막  길이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에게는 농어촌 버스만이 읍내로 나올 수 있는 길인데, 그 버스를 타려고 오르는길이, 버스에서 내려가는 길이 너무 힘들기만 하다. 


지역사회의 건강에 이바지 하겠다고 나온 의사로써, 지역주민의 삶을 이런식으로 보게 될줄 몰랐다.

면허를 따게 되고, 차를 구입하게 되면, 농어촌 버스에서 보이는 지역주민의 삶이 보이지 않겠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읍내 나가려면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지 모르겠지? 


자동차라는 하나의 도구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나를 멀어지게 할 수 있는지 이제서야 알았다. 


시간이 지나더라도 종종 버스를 타고 다녔으면 한다. 버스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아마 이러한 광경들이 신이 나를 이곳 강진으로 보낸 이유가 아닐까 하다. 


눈이 시리다. 잠이 온다는 이야기다.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