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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phunga 진료소 일기

카풍아 진료소 일기 - 놈필로 이야기


  이른 아침마다 닭과 염소가 울어, 그 소리에 잠을 깨는 곳, 여름이면 양철지붕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늦 잠을 잘 수 없어 자연스럽게 잠이 깨는 곳. 우기가 되면 한밤인데도 천둥번개 때문에 대 낮 밝은 곳. 남반 구 어디쯤인데, 아프리카의 남쪽으로 있는 나라, 국경의 대부분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둘러 싸여있고 고 지대인 땅, 스와질란드 왕국이다. 의과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의사로 일하고 있는 곳. 내가 의사가 되 자마자 온 곳. 의사로 환자를 처음만난 곳이기에 많은 환자들의 기억이 있는 곳, 내가 이곳에 있거나 떠 나도 아쉬움이 넘쳐나는 곳이다.


  놈필로를 처음 만난 것은 스와질란드에 온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그 주 화요일 오후에 도착했고, 수요 일 아침부터 진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첫 주말이었다. 방문 진료를 위해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들어갔다. 30분 정도 지나서였을까, 언덕길 아래쪽에 몇 채의 집이 보였다. 가까이 가서보니 진흙과 바 위 그리고 짚으로 만든 집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을 안 한 아주머니가 큰 집에서 나왔다. 그리고 아주 머니는 우리를 어느 한 집으로 데려갔고 그 집의 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누군가 누워있었다. 거의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안에서 누워있던 그 사람은 덮고 있던 낡은 담요를 내렸다. 그리고 힘들어 보 이는 기색이었지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가 20대 후반의 HIV환자 놈필로였다. 그것이 첫 만남이었다.

  놈필로는 대다수의 스와지사람과 마찬가지로 돈을 벌기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갔다. 스와질란드 에는 충분한 일자리가 없고, 있다 해도 그 일당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그러기에 이 나라의 많은 사람 들은 옆 나라의 광산 등으로 일을 하러간다. 놈필로도 그랬다. 돈을 벌기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갔 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곳에 있으면서 자신이 HIV양성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 고 더 이상 일을 견뎌 낼 수 있는 몸이 아닌 것을 알게 되자 고향 카풍아로 돌아 온 것이다.

  놈필로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의사로서 그에게 무엇을 해줘야하는지 알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었다. 의과대학을 졸업해서 면허가 있다고 하지만, 내가 환자를 만난 곳은 병원이나 의원이 아니었다. 스와질 란드의 산골마을의 작고 초라한 집에서 담요를 두르고 누워있는 환자를 보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 하였기에 긴장한 탓일까? 환자를 대하면서 시작할 수 있는 따뜻한 말이나 건강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보 다는 지금의 증상을 물어보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한 20분 동안 그 방에 앉아있었을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나의 서툰 진료에 시간이 매우 길게 느껴졌다.


  다음 방문 진료일이 되었다.나와비슷한나이에아무것도하지못하고 빈방에누워있기만해야하는 HIV환자를 보러간다는 것은,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한국에서 편하게 공 부를 했지만, 놈필로는 다른 나라에 일을 하러 가야 했고, 그리고 병에 걸렸기 때문일까? 나는 전기와 물이 들어오는 편한 집에서 살고 있지만, 전기와 물이 없는 작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나와 대조되는 삶의 모습들이 죄책감을 가지게 했고, 그 감정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봤기 때문에 좀 나아진 것일까? 처음 만났을 때 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들어보 면 하루 종일 방에만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날씨가 따뜻할 때, 햇빛을 쐬기 위해 좀 밖에 나가있어 보라고 부탁을 했다. 놈필로는 웃으면서 나가 보겠다고 했다. 설사는 멈추었다고 했지만, 기침은 멎지 않는 다고 했다.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들이 지나갔다. 하지만 이곳에서 스와질란드에서 HIV환자들에게 특별히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HIV환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다른 기관들의 원조를 받아 항바이러스 치료를 정 부병원에서 시행중이고, 상당수의 사람들의 그 치료를 받고 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들을 관리하고, 그들의 상태가 나빠졌을 때 찾아가 다른 병들을 치료해주고, 영양지원을 해주는 일 밖에 없다. 놈필로에게도 이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세 번째 방문 이었다. 그날따라 날씨가 흐려 매우 추웠다. 놈필로의 방문은 언제나처럼 닫혀 있었고, 문 하나와 막혀 있는 창문 하나 있는 방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 방안은 나무 타는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차 있 었다. 이러한 공기를 하루 종일 마셔댔다가는 나라도 병이 날 것 같은 방 안이었다. 창문과 방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놈필로는 춥다고 난리를 쳤다. 하지만 문을 여니 연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불은 더 잘 타 게 되고 방안은 더 따뜻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계속되는 기침으로 이야기를 지속 할 수 없었다. 혹시나 폐렴이나 결핵인가 하는 걱정으로, 호흡음을 들어보기로 했다. 세 번의 방문 만에 처음으로 놈필로가 담요를 걷어내고 앉았다. 청진을 하기위해 등 쪽으로 갔다. 등은 너무나도 말라 뼈밖에 보이지 않았다. 갈비뼈와 어께 뼈가 그대로 들어나는 등이었다. HIV와 싸우기에는 너무나 말라 있는 몸이었다. 이렇게 말라 있는 몸으로 과연 병과 싸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호흡음을 듣고 나니, 놈필로의 어머니가 욕창을 소독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고보니 지난 세 번의 방문 내내 오른쪽으로만 누워있었던 것을 그때야 깨달았다. 아 그래. 그랬구나. 욕창은 이미 많이 진행이 된 상태라 피와 고름이 섞여있었다. 장갑을 두 겹 끼고, 고름을 닦고, 소독을 하고,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아주었다. 그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HIV환자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까? 나는 스스럼없이 그 일을 했 다. 병원실습 때는 회진을 도는 것 마저 피하려 했었고, 처음 이곳에 와서는 보호 장비를 착용한 뒤 환자 에게 다가가려 했었는데, 이젠 내가 돌봐야 하는 환자이고, 이미 내가 돌봐 온 환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까? HIV환자에 대한 심적 두려움은 더 이상 없었다. 거리감 더 이상, 그것이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앙상하게 뼈만 남아있는 그 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속적인 영양관리가 필요하 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꾸준히 잘 먹고, 체중이 불고, 몸에 힘이 생기면, 항바이러스 제를 먹으면서 잘 견 딜 것이고 그러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면 더 이상 방안에만 누워있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고 진료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소식을 전해주었다. 지난 주, 놈필로가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었다. 날짜를 물어보니 방문 진료를 하고 난 다음날이었다. 손을 잡고, 호흡음을 듣고, 욕 창 소독을 해준 그 다음날이었다. 정말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3주 밖에 안 되는 시간이지만 매주 얼굴 을 보아왔고, 이제 이렇게 하면 되겠다는 갈피가 잡히는 듯 했는데, 그러한 고민에 대한 실행을 시작하기 도 전에 죽은 것이다. 아무리 사람의 죽음이 하늘에 달렸다고 하지만 이러한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를 꽤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죽음을 막기 위해 내가 해 왔던 일들이, 그리고 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나를 무기력 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죽음을 막고 싶어졌다. 이곳 아프리카에는 다른 땅보다 더 많은 죽음이 일 어나고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 무엇일까? 병에 걸려 있는 환자를 더 많이 돌보는 것 일 까? 그러기 위해 많은 의사를 이곳으로 보내는 것일까? 아니면 첨단 의료시설이 있는 병원을 만드는 것 일까? 하지만 이것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차라리 이들이 병에 걸리지 않도록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잘 먹고, 잘 자고, 잘 씻고, 잘 쉰다면 질병에 걸릴 확률자체가 줄어들지 않을까 라는 생각 말이다. 단지 질병에 걸렸을 때만 환자를 돌보는 그러한 의사가 아니라, 이들의 삶 자체를 보 고 좀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좀 더 옳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일을 위해서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들이 사는 곳에 살아야 하고 이들의 삶을 돌보는 그러한 사람 말이다. 하지만 그 일들이 한 사람에게 의존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도 사람이기에 결국 그곳을 떠 나야 하거나 나이가 되면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곳에서의 일은 다 끝나버리지 않을까? 지 속가능한 일들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내가 카풍아를 떠나더라도, 또는 다른 아프리카 어딘가에서 누군가 가 떠나더라도, 이들이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을 만들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변 화에 나도 참여하고 싶다. 훗날 나와 같은 사람이 없더라도 이들이 꾸준히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말이다.

  아마 놈필로의 죽음은 단순한 불치병 환자의 죽음으로 기록 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왜 병에 걸렸고, 어 떠한 상태로 그 병과 싸워왔는지를 본다면, 그것은 단지 한 사람의 질병이 아니라 이곳 전체의 상황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더 많은 노력과 사람이 이 땅에 필요하다. 아직도 이 땅 아프리카에 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어떠한 간호도 받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방문 진료 날이다. 그리고 난 곧 이곳을 떠나야 한다.


2011.11.23